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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정공>겸암공휘정환(연승)묘표(謙菴公諱正煥(淵承)墓表)
謙菴公諱正煥墓表 古者求忠臣於孝子門之言是由倫理上境殊理同之故也遡此而若云救孝子於孝子門尤属勿論何者盖由血系而傳統之思想濡染之動作自當有不能己焉居家則孝友睦婣爲業出仕則移孝於忠如是歷世承襲蔚然爲鄉黨摸楷古法家如公家者吾宗黨中指不多屈歟公諱正煥字士顯別號謙菴也貫是玉川而淳昌之舊號也吾趙在麗朝中末葉世不乏簪纓至中祖諱元吉諡忠獻門下侍中受封爲玉川府院君見國事日非棄官退居次房諱瑜號虔谷官典農寺副正及麗朝屋社決然解印杜門罔僕己而遯隱于昇平之謙川朝鮮太宗累徵以好爵而不就歿後世宗以忠孝旌閭幷賜禮葬其次房諱崇文號竹村諡節愍以咸鏡兵馬節度使及端宗遜位與子諱哲山號龜川同罹六臣丙子之禍是以宜有史氏之評曰農隱虔谷父子之於前朝竹村龜川之於後朝連四世皆能移孝於忠其芳節高義足可以照耀書史也嗣後子姓益繁衍文武使宦文學行義種種有聞于世至贈祖諱鎭龍號湛軒廣施恩義有四面春風之頌祖諱善浩號述菴考諱秉斗號龜亭妣全義李氏燮女文貞公鎭儀后也高宗丁亥五月十五日公生于龜山世庄自幼不惟濡訓傳統家風性本諄謹愛親敬兄之道不敎自能不幸幼年失怙常以未熱承嚴顔爲恨事慈親殫竭孝誠事家兄盡愛敬事叔父如所生先意承順就師受業讀之書之出儕輩文藝夙成每事禀于兄與叔父而後行一無自擅之事及長雖分戶各炊得一珍味必分而嘗之丁每夫人之喪哀號擗踴來弔者莫不拭涕其惻怛痛恳之狀有以致感動傍觀矣平居非法之言不出諸口非禮之聲色不接於耳目與物無競家無長物德性寬溫凡於承上接下待人之道均獲歡心未曾有忿勵之容色尤至於事兄彷彿溫之保嬰朝於斯暮於斯怡怡焉陶陶焉不知老之將至晩歲深傷時變揮斥外事杜門守志以丙戌十二月十日終于寝享年五十九葬于同面金谷案山卯坐原配長興任氏泰奭女生于丁亥一月五日婦德俱備後夫子三十一年而卒于戊午九月三十日合窆于夫墓擧三男三女長男休泰次男休一季休暎女長適李英淳次適鄭元均季適安鳳燮休泰生三男一女男長武勲次昌勲季東勲女適鄭秀男休一生一男三女男長忠勲女長適李宰哲次適徐休暎生二男六女長男弘容次民容女長適李餘不盡錄嗚呼公雖不遇未得展蘊然溫恭有德寄世而鄉黨之愛逝世而有鄉黨之悲誰不曰善彦哉其胤昆季均與余相善視同骨肉向者休暎來謁公之墓文余雖不文誼不得辭按狀略敍以供立言者之裁擇也 檀紀四三二○年 丁卯(1987년)一月 日 大韓民國臨時政府 前國務委員 宗黨 白岡 擎韓 撰 겸암공휘정환묘표(謙菴公諱正煥墓表) 옛날에 충신(忠臣)을 효자(孝子)의 집안에서 구했는데 이는 윤리(倫理)는 비록 다르지만 이치는 같기 때문이었다. 이를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면 효자의 집에서 효자가 나온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대개 혈통(血統)에서 전해오는 사상(思想)에 물들어서 행실이 저절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 우애(友愛)하며,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다가 나가서 벼슬할 때에는 집안에서 하던 효도를 옮겨 나라에 충성을 하게 되며, 이처럼 여러 세대를 지내게 되면 충효를 이어받음이 성대(盛大)하게 되어 고을에서 모범을 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범되는 집안으로 공(公)의 집안만한 집은 우리 일가 가운데도 그리 많지 않을까 한다. 공의 휘(諱)는 정환(正煥), 자(字)는 사현(士顯), 별호는 겸암(謙菴)이시다. 본관이 옥천(玉川)인데 옥천은 바로 순창(淳昌)의 옛이름이다. 우리 조씨는 고려(高麗) 중엽(中葉)과 말엽(末葉)에 벼슬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는데, 중시조(中始祖) 휘 원길(元吉)은 시호(諡號)가 충헌(忠獻)이신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시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지셨다. 날로 나라 일이 잘못되어가는 것을 보시고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셨다. 둘째아들 휘 유(瑜)는 호가 건곡(虔谷)으로 전농시 부정(典農寺副正)을 지내셨는데, 고려 왕조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는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두문 불출(杜門不出)하시며 절의(節義)를 지키시다가 마침내 승평(昇平) 고을 겸천(謙川)으로 내려와 은둔(隱遯)하셨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 좋은 벼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으셨는데 돌아가신 후에 세종(世宗)이 충효(忠孝)로써 정려(旌閭)를 내리고 아울러 예장(禮葬)을 명하셨다. 부정공의 둘째아들 휘 숭문(崇文)은 호가 죽촌)(竹村), 시호는 절민(節愍)이신데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兵馬節度使)를 지내시다가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자 아들 휘 철산(哲山), 호 귀천(龜川)과 함께 사륙신(死六臣)과 같이 단종 복위운동(復位運動)에 가담하다가 화(禍)를 입으셨다. 그래서 역사를 쓴 사관(史官)이 평론하기를 「농은공과 건국공은 고려 때에 충성을 바치고, 죽촌공과 귀천공 부자(父子)는 조선에서 충성을 바쳐 연달아 四대가 집안에서 하던 효도를 옮겨 나라에 충성하였으니, 그 아름다운 절개와 높은 의리는 역사책에 환히 빛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자손이 더욱 번성하여 문무(文武)의 관원과 문학(文學)과 행실이 뛰어난 인물이 많이 세상에 알려졌다. 증조 휘 진룡(鎭龍)은 호가 담헌(湛軒)인데 은의(恩義)를 널리 베풀어 사람들이 「언제 보아도 봄날씨처럼 온화하다.」라고 칭송하였다. 할아버지 휘 선호(善浩)는 호가 술암(述菴)이며, 아버지의 휘는 병두(秉斗)로 호가 귀정(龜亭)이요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희섭(熙燮)의 따님으로 문정공(文貞公) 이진의(李鎭儀)의 후손이다. 공은 고종(高宗) 정해년(一八八七) 五월 十五일 귀산(龜山) 집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비단 가정의 교훈(敎訓)을 잘 따랐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본디 순후(淳厚)하고 조심스러우셨으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兄)을 존경하는 도리를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았다.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항상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는데 효성을 다하였으며 형을 애경(愛敬)으로 받들고 숙부(叔父)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뜻을 따랐다. 스승에게 나가 글을 읽었는데 항상 다른 동접(同接)들보다 뛰어났으며,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었다. 모든 일을 다 형과 숙부에게 의논한 후에 행하였지 한 번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일이 없었으며, 자라서 비록 분가(分家)하여 따로 살았지만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서는 슬피 울부짖고 가슴을 치고 뛰어 문상(問喪)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그 슬퍼한 모습을 보고 감동하면서 바라보았다. 평소에 본받을 만한 말이 아니면 입에서 내지 않았고 예(禮)가 아닌 말이나 노래는 보거나 듣지 않았으며,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사치스런 물건이 없었다. 성품이 덕성스럽고 온하하여 윗사람을 대할 때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가 같아서 똑같이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애썼다. 일찍이 한 번도 성내는 말이나 얼굴을 하지 않았으며, 형을 공경하여 섬기는 것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정승 사마온공(司馬溫公)이 그 형을 받든 것과 같았다.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즐겁고 화락한 모습으로 지내 늙어가는 줄을 잊고 사셨다. 만년에는 나라의 일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보고는 밖의 일을 물리치고 문을 닫고 자신의 뜻을 지키다가 병술년(一九四六) 十二월 十일 정침(正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五十九세이셨다. 동면(同面) 금곡(金谷) 안산 묘좌(卯坐)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 장흥임씨(長興任氏)는 태석(泰奭)의 따님으로 정해년 一월 五일에 출생하였는데 부덕을 갖추셨으며 공보다 三十一年 뒤인 무오년 九월 三十일에 돌아가셨으며 묘는 합봉(合封)이다. 三남三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휴태(休泰), 차남(次男)은 휴일(休一), 계남(季男)은 휴영(休暎)이며, 장녀는 이영순(李英淳)에게, 차녀는 정원균(鄭元均)에게, 계녀는 안봉섭(安鳳燮)에게 출가하였다. 휴태는 三남一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무훈(武勲)이요 차남은 창훈(昌勲)이요 계남은 동훈(東勲)이며 딸은 정수남(鄭秀男)에게 출가하였다. 휴일은 一남二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충훈(忠勲)이요 장녀는 이재철(李宰哲)에게 차녀는 서(徐)에게 출가하였다. 휴영은 二남六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용(弘容) 차남은 민용(民容)이며 딸은 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은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불우(不遇)하게 한 평생을 지내면서 뜻을 펴지 못했으나 온공(溫恭)하시어 살아서는 고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돌아가셔서는 고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아까워하였으니, 그 누구가 훌륭한 인재(人材)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이분의 아들 형제들과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 형제나 다름이 없는데, 지난번 유영씨가 나를 찾아와 공의 비문을 청하였다. 내가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지만 정의(情誼)로 보아 사양하지 못하고 행장에 따라 대략 기술에 후일 공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사람이 가려서 쓸 자료로 삼는다. 檀紀四三二○年 丁卯(1987년)一月 日 大韓民國臨時政府 前國務委員 宗黨 白岡 擎韓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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